원숭이에서 인간이 되는 대화 스킬을 갖추는 법

김은주 0 42 03.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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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냥 개인적인 소회를 적듯이 아무렇게나 적어간 글이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추천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셨습니다. 갓 잡힌 생선처럼 입만 살아서 팔딱팔딱 뛰는 글임에도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글쓰기 연습은 충분히 되고 있어서 저도 얻어가는게 크네요. 댓글로 많이 언급해주신 말꼬리 잡는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적어보고자 합니다. 당연히 제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내용이므로 모두에게 적용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번에는 저번보다 좀 내용이 길기 때문에 바로 확인하실 분들은 8번으로 가시면 됩니다.

2. 이전 글에서 저는 유인원(앞으론 원숭이라고 하겠습니다)에서 이제 겨우 인간처럼 대화하게 된 수준이며 아직도 갈길이 멀다 말씀드렸는데요. 대화 센스는 아직도 유아가 옹알대는 수준이고 내향적인 인간이라 낯선 사람들 앞에 서면 얘기도 잘 안하려고 합니다. 행색을 보면 뭐여 이렇게 하고 다니는 색히가 글로는 판춘문예를 써놨어? 하실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건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말도 있잖아요. 선동렬이 야구감독하면 야 이렇게 던져 그게 어렵냐 이러고 차범근이 축구감독하면 그냥 이렇게 툭툭 차다가 슛 해 이런다고. 원래 대화 센스가 좋으신 분들은 대화를 그냥 감각으로 하시지 그걸 정량적으로 계산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하시는 걸 많이 보았습니다. 이게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이윱니다.

3. 잡소리가 길었네요. 이전 글에서 설명드렸다 시피 대화의 절대 명제는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고 그래서 대화할 때 자기 얘기만 하고싶고 상대방은 그저 녹음버튼을 누른 카세트처럼 입은 뻐끔거리지도 못한채 듣기만 했으면 좋겠지만 사회 구성원으로 태어난 이상 어느 정도는 남 얘기를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공감도 할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 연습에 매진했는데 몇 개월이 지난 어느날 아주 강렬한 경험 하나를 하게 됩니다.

4. 그 날은 모임에서 외부 활동을 위해 연합으로 모여 어디론가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기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던 시절이었고 좌석버스에 타고 보니 옆자리엔 다른 모임에서 온 처음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차가 출발하고 옆자리와는 신변잡기를 하고 있는데 여자가 순간 대화중에 칠레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꺼냅니다. 칠레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고 분명히 거기에 여행을 간 이유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한 저는 칠레 여행을 중점적으로 말꼬리 잡기 시작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2시간동안 칠레 여행에 대해 석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합니다. 전 매우 듣기 지겨웠지만 딱 3개의 말로 2시간을 끌었습니다. '아~', '우와~', '진짜요?'. 좋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 3마디로 상대방의 수비라인을 탈탈 털었고 우리는 도착지에 내려서 각자 볼일을 봤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여자가 자기와 친하던 무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칠레에 여행갔다왔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엄청 꼬치꼬치 캐묻고 자기 얘기를 하더라구. 내 얘기가 재미있었나봐". 전 3마디만 돌려가며 했는데 수비라인이 털린 그녀는 자기가 콜드게임을 당한지도 모른채 제가 계속 얘기를 주도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전 이 얘기에 충격을 먹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며 자기가 얘기를 하게 되면 상대방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5.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 여자의 무리에 있던 다른 사람과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이때는 좀 더 숙련이 된 상태이고 상대방도 저와 잘 맞는 사람이라 구라 조금 섞어서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고 있는데(이때는 인생 자체를 대화에 걸던 시절이라 기가지니보다 대답을 더 잘했습니다), 이때도 제가 한 말은 위에 3마디랑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주제어를 바꿔주거나 하는 정도였죠.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집에 가는데 문자가 옵니다. "오빠랑 내가 마음이 이렇게 잘 맞고 공통점이 많은지 몰랐다. 태어나서 이렇게 내 얘기에 호응해준 사람은 처음이다. 소울메이트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내가 오바했다면 미안하다". 재밌는 것은 이 친구가 저에게 공통점이 많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얘기하는 내내 한 번도 나도 그렇다며 동조한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얘기를 하게 되면 상대방의 생각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는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고 이 날을 기점으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명제를 확실히 사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드럽게 재미없는 인간이든 말주변이 없는 인간이든 진지충인 인간이든 소갈머리없는 인간이든 그딴 것은 아무 상관이 없고 그저 자기 얘기를 하도록 유도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죠. 물론 틀렸습니다.

6.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의 문제는 나를 온전한 내가 아닌 대답머신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클로바나 기가지니는 가끔 똑바로 말해도 못 알아처먹을때가 있는데 저는 얘네들보단 확실히 대답을 잘 했으니 당시의 전 현재 과학기술보다 10년은 더 앞서간 생체 AI 머신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그때부터 자신이 해야될 선택을 저에게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핸드폰 케이스는 무엇을 살지부터 시작해서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옷은 어떤 것을 살지, 이 친구와는 계속 친하게 지내야할지, 전공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심지어는 속옷은 무엇을 입을지, 사이즈는 몇으로 할지, 더 나아가서는 지금 남친이랑 잠자리를 계속 할지 등등. 이쯤 되면 어떤 상태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이건 절대로 건강한 사이가 아닙니다. 서로 설레는 도중에 발생하는 응답들도 아니구요. 상대방에게 저는 그냥 선택권을 쥔 감정의 배출구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야 와 원숭이였던 내가 이제는 얘 속옷을 골라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나중엔 이런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곧 알게 됩니다. 그냥 하수구 수챗구멍처럼 한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을 모두 모아 한번에 내려버리는 감정의 배출구가 된 것일 뿐입니다(이쯤 되면 구글에서 연구해야 할 생체 AI 머신으로는 정말 최적이었을텐데). 따라서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터닝 포인트를 알아채야만 합니다. 그 포인트가 지나버리면 다시 수습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저처럼.

7. 아무튼 주의사항도 강력하게 얘기를 드렸으니 이제 말꼬리를 잡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정도까지 길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대화 스킬이라는 것이 결국엔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흘러 넘칠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별것도 아닌 얘기에 6단락이나 소비했으니 후회가 되기는 한데 이제와서 고칠수도 없으니 코인 떡상 믿듯 계속 가보겠습니다.

8.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배우 최재성은 보스가 조직을 이끄는데 필요한 것이 돈, 믿을만한 부하, 그리고 심장이라고 말합니다. 멋있게 인용하려다 수습이 안되긴 하는데 어쨌든 말꼬리를 잡을때는 눈치와 진심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눈치는 상대방이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용도입니다. 자꾸 관심없는 주제로 얘기를 꺼내거나 물어보는 사람을 우리는 성격은 좋은 착한사람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그냥 눈치없는 색히를 돌려서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 가족, 돈, 연애, 직장, 꿈, 사랑, 친구 등 인간이 누구나 관심가질만한 주제로 얘기를 꺼내가야 하고 제가 자꾸 여행 얘기를 예로 드는 이유 또한 이와 같습니다. 여행은 사람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니까요. 돈도 몇 백만원 쓰고 왔는데 얘기 하기 싫은 사람은 없죠. 근데 눈치없는 색히들은 쓸데없이 만나자마자 혹시 자동차 좋아하시냐며 쏘나타가 내년에 페이스리프트 된다는 헛소리만 합니다. 그 뒤에 붙는 말은 가관. "혹시 자동차 안 좋아하세요?". 저러면 상대방은 자동차가 문제가 아니라 본인을 안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말꼬리를 잡을때 따로 묻지 않아도 몇 마디 오고가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진심 입니다.

9. 저도 처음엔 대화 스킬이라는 것은 전투기에 달린 미사일 같은 거고 조준 연습 잘해서 정확히 발사해 목적 달성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미사일을 발사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조준 연습이 아니라 '이 버튼을 누름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모든 상황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알았죠. 말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꼬리 잡겠다고 마음 먹지만 처음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가 원숭이인데 상대방인 인간이 뭘 좋아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까요(바나나를 권할수도 없는거고). 그래서 말꼬리를 잡기 위해 듣기는 지겨울 수 있어도 진심을 다해 상대방 얘기를 경청하려 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몇몇 사람들을 지켜보며 판단한 바 대화 스킬만 주구장창 연구한 사람들은 진심이란게 없어서 대화를 하면 할수록 속이 빈 것 같고 사기꾼 느낌이 많이 듭니다. 앙꼬 없는 찐빵, 고무줄 없는 빤스죠. 뭐 저도 그런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10. 이 두가지를 이용해 말꼬리를 잡기 시작하면 갑자기 상대방이 웅변 대회에 나온 것처럼 피치가 높아지거나, 아웃사이더 성대모사 하듯이 듣는 사람에게 쉴 틈을 안주고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부터는 주제가 끊기지 않게 대답을 잘 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럼 라스베가스에서 또치가 접시를 돌리듯 대화는 계속 돌아가죠. '아~', '우와~', '진짜?'. 이거 세개면 얘기는 멈출줄을 모르고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남들이 모르는 상대방의 비밀들을 하나씩 들을 수 있는 것은 덤. 그리고 그 비밀을 이용해서 다시 접시를 돌리는 것을 반복하면 대충 2시간 뒤엔 열에 아홉은 이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나 원래 이렇게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니긴 뭘. 그리고 다른데 가면 추가로 또 2시간 얘기합디다.

11. 아무튼 저도 이렇게 적어내려가긴 했지만 당연히 모든 상황에서 얘기를 잘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은 그 누구보다 있었지만 마음이 안 맞거나 애초부터 나를 싫어했던 사람 등등에게는 시도도 못한 적 많고 지금은 이런 태도를 아예 버렸으니 더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건 이런 능동을 빙자한 수동적인 태도가 저의 본성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오늘도 친구들을 만났는데 경청이고 뭐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얘기하는게 저는 더 즐거웠네요. 모든 대화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는 거니까 남을 위해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결론입니다. 스킬이 전부라고만 생각하며 주화입마에 빠지지 마시고 개똥철학 가운데서도 적절히 취사선택 하신다면 원숭이가 사람 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혹시 내용이 괜찮았다면 다른 경험들도 한번씩 풀어보겠습니다.


출차:디젤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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